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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길로 간 사람들 [14]

[ 2023-04-07 09:24:10]   

 
세상 영화보다 주님만 바라보고
정정숙 박사
 

(27) 순장로교회를 세운 이계실 목사


‘순복음교회’라고 하면 신자들은 물론이고 불신자들까지 알고 있지만, ‘순장로교회’라고 하면 의아하게 생각하는 이들이 많을 것입니다. ‘순장로교회’는 이름 그대로 순수한 장로교회의 신앙을 지키려는 믿음의 공동체입니다.
순장로교회를 이 땅에 조직한 이는 이계실(李桂實) 목사입니다. 그는 1889년 9월 17일 함경남도 함흥시 본궁(本宮·궁서동)에서 이증규와 박 씨 사이의 6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부터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고, 아버지와 가까이 지내던 본궁교회 남 장로가 한문으로 된 성경을 주며 읽어보라고 권면하여 열심히 읽었습니다. 그는 그렇게 남 장로의 인도로 본궁교회에 출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가정의 핍박이 심하자 가족전도를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먼저 할머니를 인도하였고 이어서 어머니를 전도하였습니다. 아버지가 엄하여 전도하기가 어려웠으나 아버지 옆에서 잠언과 시편을 소리 내어 읽었고, 남 장로가 계속 권면하여 아버지도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이계실은 남 장로의 권면으로 1915년부터 1918년까지 성경학원에서 수학하였고, 그 후 본궁교회의 집사와 영수로, 또 캐나다 선교사 도율림(D.W. McDonaldo)의 전도인이 되어 개척 전도의 현장에서 헌신하였습니다.

마구례(Duncan M. McRae) 선교사 부인이 원산에서 주일학교 사역을 할 때 변영실을 양녀로 삼아 캐나다에 데리고 갔다가 귀국하여 1920년 7월에 이계실과 변영실을 결혼시켰습니다.

이계실은 함경도 지방의 여러 교회에서 전도사로 사역하였고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1931년 3월 제26회로 졸업하고, 1932년 5월에 함남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당시 캐나다 선교사들은 자유주의 신학을 추종하였고, 다른 장로교 선교부와 갈등관계 속에 있었습니다. 이계실은 캐나다 선교사들의 자유주의 신학을 따르지 아니하여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는 함흥 북주동교회를 담임하면서 주변에 있는 9개 교회를 순회 시무하였습니다. 신사참배 강요의 바람이 불자 4개 교회는 신사참배를 하였고, 5개 교회(본궁교회 일부 성도들)는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이계실과 함께 신앙을 지켰습니다. 이들은 나중에 남한으로 피난을 와서 순장로교단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그는 1921년 함경남도 함주군 동천면 풍서리에 덕천교회를 세웠습니다(오늘날의 동천교회의 모체). 선교사들의 후원과 교인들의 헌신으로 교회는 날로 부흥되어 갔습니다.

덕천교회를 중심으로 하여 여러 교회들이 설립되었습니다. 그러나 1930년대 후반에 와서 신사참배, 창씨개명, 국어 상용 등 일제의 ‘한민족말살전략’이 실시되었습니다. 장로교와 감리교가 신사참배에 굴복하고 신사참배 반대자들을 박해했습니다.

이계실은 자신이 돌보던 덕천교회 등 여러 교회들을 함남노회에서 탈퇴하게 하고 신사참배를 반대했습니다. 그 교회들의 평신도 지도자들이 체포되어 고문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로 8.15 해방을 맞았으나 공산당의 또 다른 박해가 계속되어 갔습니다. 주일 선거, 기독교도연맹 등을 반대했기 때문에 고난은 계속되었습니다.

6.25 한국전쟁의 발발, 국군과 유엔군의 북진, 중공군의 참전, 유엔군의 후퇴 등이 이어졌습니다. 여기서 세계전쟁사에서 유명한 ‘흥남부두 철수작전’이 있었습니다(이 사건은 영화로 소개되었고 많은 책이 나와 있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합니다).

죽음의 골짜기를 지나 이계실과 6개 교회 성도 130명은 미군 수송선에 타게 되었습니다. 이 일의 공로자는 군목인 보켈(Harold 패다디) 선교사와 현봉학 박사였습니다.

1950년 12월 22일 영하 30~40도의 강추위 속에서 피난민 구출작전의 마지막 배인 미국 상선 메르디스 빅토리(Meridith Victory)호가 배에 실은 무기를 전부 버리고 피난민 14,500명을 태우고 철수했습니다. 유행가에 나오듯 ‘바람찬 흥남부두’에서 기적의 역사가 일어났고, 이 일은 기네스북에 등재될 정도의 사건이었습니다.

이계실과 성도들은 남해의 거제도에 도착하여 ‘덕천연합교회’를 세우고 신앙생활을 하다가 고향에 돌아갈 희망이 사라지자 부산 문현동으로 옮겨서 새로운 둥지를 만들었습니다.

이계실은 그 후 재건교회와 합했습니다. 신사참배 반대라는 신앙의 동질성이 있었고, 재건교회에 목사가 한 명도 없는 현실적인 문제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연합은 오래 가지 못하고 각자의 길을 갔습니다.

1955년 10월 서울 영등포에 정부의 땅 2,400평을 불하받아서 성도들이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 산107번지 땅에 2-30평씩 구획하여 두 세대 씩 흙벽돌집을 지어서 50여 호가 집을 마련했습니다.

교회도 임시 천막을 사용하다가 이듬 해 3월에 76평의 목조건물을 지었습니다. 이어서 사택, 신학교, 성경구락부 등을 세웠습니다. 마치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신대륙으로 온 메이플라워호의 청교도들을 생각나게 합니다.

성경 연구, 철저한 경건 생활로 신앙의 새로운 모델을 형성하였고, 교회 숫자는 많지 않지만 순수 신앙을 지키는 교단이 되었습니다. 또 서울성경신학대학원대학교를 소규모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지도자 이계실 목사는 1971년 1월 9일 82세의 일기로 하나님의 나라로 이사 갔습니다. 


(28) 개혁주의적 개교회주의자 안길옹 목사


사람이 살면서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그 삶이 달라지는 것은 세상의 원리입니다. 사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 바울로 바뀐 것이 가장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좋은 스승과 좋은 친구와 좋은 배우자를 만나는 것은 우리가 누리는 최고의 복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들의 영향으로 우리가 변하여 새로운 존재가 됩니다.

그런 사례를 안길옹 목사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진보적 신학을 배운 사람이 스승을 통하여 개혁주의적 개교회주의자가 된 사례입니다.

안길옹은 1918년 6월 13일(음력 5월 5일 단오절)에 평안북도 정주군 갈산면에서 안세흡 장로의 5남으로 출생했습니다. 그는 장로의 아들로 어릴 때부터 신앙생활을 철저히 하였습니다. 그는 1937년에 이실찬과 결혼하여 귀한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신앙의 전통이 아름답게 계승되어 기업의 열매가 되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안길옹은 당시 최고의 학문을 배웠습니다. 그는 일본으로 유학하여 교토의 도시샤(同志社)대학교 법학부를 졸업했습니다. 도시샤대학교는 일본 최고의 기독교대학으로 유명했습니다.

그는 귀국하여 조선신학교(오늘의 한신대학교 전신)에서 공부하다가 연세대학교 신과대학으로 편입하여 졸업했습니다.

안길옹이 공부한 학교들을 보면 신학적 입장에서 자유주의 혹은 진보주의적 경향이 있는 학교들입니다. 그의 사상도 여기서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는 목회 일선에 헌신하여 신학생 시절에 경기도 광주군 내곡리교회를 담임하다가 6.25 한국전쟁 때 부산으로 피난하였습니다. 그곳에서 기장 측의 신진 지도자였던 강원용 목사가 유학을 떠난 후 그 교회의 강단을 맡아서 봉사했습니다.

그는 서울 수복 후 경기도 광주군 언주동 신사리교회에서 시무할 당시에 고향 친구인 서울 명륜동교회 이병규 목사와 교류하던 중 아현교회 김현봉 목사를 소개받아서 성경공부에 심취하였습니다.

1957년부터 1964년까지 서울 영등포구 노량진동의 송학대교회(통합)를 시무하다가 장승백이 언덕 위에 일신교회를 개척하고 개교회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이것은 김현봉 목사의 영향입니다.

안길옹의 신학사상이 성경적 개혁주의로 바뀌는 결정적 계기가 김현봉 목사의 성경공부에서 이루어졌고, 안길옹은 이것을 계승하고 발전시켰습니다.

안길옹과 뜻을 같이 하는 목회자들이 모여 ‘로고스공의회’를 조직하였습니다. 이 모임은 철저히 교단성을 배제하였고 개교회주의를 원칙으로 하는 순수한 목회자끼리의 모임이었습니다.

이 모임은 필요할 때만 모였다가 회의가 끝나면 바로 해산하여 다시 개교회로 돌아가는 형식이었습니다. 로고스신학교도 운영하여 후배양성도 했습니다. 그러나 교계의 개혁주의 독립교회에 대한 이해 부족과 회원들 간의 의견 차이로 초기 회원들 대부분이 각 교단에 가입하였습니다.

안길옹은 일신교회를 중심으로 로고스공의회와 신학교를 계속 이끌어 나갔고, 교역자 모임도 주재하였습니다.

일신교회는 정통적 개혁주의를 중심교리로 하고 교회 조직도 장로, 권사, 집사 등으로, 기관으로는 남녀전도회와 주일학교, 성가대 등이 있어서 일반교회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 때 ‘일신교회가 속화되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안길옹과 일신교회는 김현봉 목사의 사상과 방법을 계승하고 발전시켰습니다.

첫째, 개교회주의입니다. 노회나 총회 등의 조직보다 각 교회가 중심이 되어서 교회를 이끌어 나가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둘째, 목회자 중심의 교회행정이었습니다. 평신도들 보다 목회자가 전부를 주관하였는데 이것은 김현봉 목사의 방법이었습니다. 안길옹은 “목회자가 언행일치를 힘쓰는 가운데 신앙양심을 바르게 써서 제반 행정 및 재정을 공의롭게 행사하고, 교인들은 이러한 교역자를 전적으로 신뢰하는 가운데 교회 제반 업무 일체를 목사의 지도하에 진행시키는 교회가 은혜로운 교회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셋째, 철저한 말씀강해입니다. 예배의 다른 순서를 줄이고 말씀강해에 집중하였습니다. 방언 등 은사주의를 배격하고 성도들의 말씀 묵상과 기도생활을 강조하고 실천하였습니다.

안길옹은 일신교회에서 전교인이 일 년에 두 차례씩 사경회에 참석하여 성경 교육을 받도록 했고, 주일학교 학생들도 교회의 기도원에서 방학 때마다 훈련을 받도록 했습니다. 그는 항상 설교 전에 찬송가 3-4곡을 불렀고 설교는 50분 정도였습니다. 그의 설교는 3대지로 구성되었습니다. 그는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꾸준히 닮아가야 한다고 가르치며 구원과 성화를 강조하였습니다.

안길옹은 매주 월요일에 도시락을 싸가지고 동역자들과 산기도 (또는 기도원)를 갔습니다. 그는 10시부터 두 시간 정도 개인기도를 하고, 한 자리에 모여서 점심 식사를 하고 오후에도 두 시간 정도 개인기도를 하고 하산했습니다. 그는 새벽기도회가 끝난 후 개인기도 시간에 구역별, 세대별로 정리된 교인명부(심방용)를 한 장씩 넘기시면서 교우들을 위해 매일 기도하였습니다. 그 명부에는 생년월일, 교회등록일자, 입교일자, 수세일자, 결혼일자 등이 작은 글씨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기도생활에 철저했을 뿐만 아니라 영적 지도자로서 모범을 보이는 목회자요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을 세밀히 살피고 면담하는 리더와 멘토로서의 역할을 잘 감당하는 목회자였습니다.
안길옹은 은퇴 후에 자신의 모든 일을 후임 목사에게 일임하고 미국 알라스카주로 가서 교포 선교를 하다가 2012년 3월 25일 미국 로스엔젤리스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현재의 일신교회는 서울 상도동에서 경기도 광명시 안양교도소 옆으로 옮겨서 1만평의 대지 위에 예배당과 각종 시설을 마련하고 그들의 신앙을 파수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발전에는 후임인 박정희 목사의 헌신과 리더십이 큰 힘이 되고 있습니다. 교회당 현판이 <일신교회 예배당>으로 되어 있어서 신앙의 옛 향기를 느끼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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