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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길로 간 사람들 [15]

[ 2023-05-02 15:51:31]   

 
세상 영화보다 주님만 바라보고

 
정정숙 박사

(29) 성경신앙의 파수자 이병규 목사
 
한 평생 믿음의 올곧은 길을 지키며 살아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조금은 편해지고 싶고 남들에게 높임을 받고 싶은 것이 인간의 심성일 것입니다.
<좁은 길로 간 사람들>은 오직 하나님만 바라고 산 사람들입니다. 사람이 보기에는 미련하게 보일지 몰라도 오직 하나님의 상주심을 바라고 살아간 ‘똑똑한 바보’들 입니다.

여기에 이병규 목사가 속합니다. 그는 앞에 소개된 다른 이들에 비하면 널리 알려진 분입니다. 그러나 그의 중심은 항상 하나님 중심이었고 하나님의 뜻을 중심으로 살아가고 헌신한 ‘주님의 종’입니다.

그는 평안도 출신으로 어릴 때부터 신앙인으로 살았습니다. 그는 이기선 목사의 제자입니다. 이기선 목사의 철저한 성경신앙과 고난을 당하면서도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순교신앙을 배우고 그것을 실천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는 공산당의 핍박을 피하여 월남하였고 고려신학교에서 박윤선 목사를 통해서 개혁주의 신학을 배웠습니다. 그는 성도간의 법정 송사 문제에 대해서는 박윤선 목사와 부산 서부교회 백영희 목사 등과 맥을 같이 하였습니다.

이병규는 서울 명륜동교회를 시무하면서 아현교회 김현봉 목사의 문하생이 되었습니다. 성경대로 살고자 하는 목회자들이 모여들어서 성경주의와 개교회주의를 주장하는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했습니다.
이들은 어떤 조직을 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성경대로 믿고, 성경대로 살기를 다짐하였습니다. 이병규는 그 그룹에서 핵심적 위치에 있었습니다.

이병규는 그의 고향 친구인 안길옹 목사를 김현봉의 성경공부 모임에 인도했습니다. 안 목사는 일본 교토에 있는 도시샤(同志社)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조선신학교에서 신학공부를 하다가 연세대학교 신과대학을 졸업한 당시 최고의 엘리트 목사였습니다.
자유주의 신학을 배웠던 안 목사가 김현봉 목사의 성경공부를 통해 완전히 뒤바뀌었습니다. 그는 서울 송학대교회를 사임하고 일신교회를 개척하여 성경적 개교회주의를 실천하였습니다.

이병규는 이런 계열의 사람들이 가지기 쉬운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자세를 가지지 않고 여러 사람을 두루 화평케하는 조화의 사람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부산 서부교회의 백영희는 강도사 인허가 취소된 후 1959년 9월 8일 고신 교단에서 제명 당하였습니다. 그후 1960년에 서부교회에서 백영희 목사 안수식을 거행할 때는 고신 교단에 소속되었다가 개교회주의로 독립한 김현봉, 이병규 등 5명의 목사들이 안수하였습니다.

또 1965년 3월 12일 김현봉 목사가 별세하였을 때 이병규 목사가 장례식을 집례한 것만 보아도 그의 역할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병규는 신촌의 이화여자대학교 정문 앞에 창광교회를 개척하여 성경신앙을 전승하는데 힘을 쏟았습니다. 그는 이기선과 김현봉의 신앙을 바로 계승했고 이것을 현대 사회에 적용하려는 노력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사모하는 이들이 창광교회로 모여들어서 독특한 전통을 이어 갔습니다.
 
이병규의 사역에서 개교회 목회와 관련된 특징을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성경적 신앙의 계승과 전파입니다. 그의 사역 가운데 특별한 것은 이기선 목사의 강해집 발간입니다. 이기선 목사의 독특한 각 장의 강해를 편집하여 책으로 출간했습니다. 사라질뻔한 자료를 정리하여 후세의 신앙인들이 읽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또 김현봉 목사의 <강도집>(설교집)을 출간했습니다. 이 책은 700 페이지가 넘는 분량의 방대한 책입니다. 지금까지는 김현봉 목사의 설교를 제자들이 받아 적어서 프린트판으로 내었습니다(이 자료들은 우리 연구실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자료들이 이병규를 통해서 집대성된 것이 놀랍습니다. 
이것을 보면 이병규의 성경사랑과 스승에 대한 존경과 사랑을 피부로 느낄 수 있습니다. 

둘째, 계약 측의 형성입니다. 개교회주의자들은 교단의 조직을 좋아하지 않고 ‘공의회’형태의 협의체를 가지는 것이 일반적 경향인데 이병규는 계약 측이라는 장로교의 한 교단을 형성했습니다.

이들은 개약신학대학원대학교를 교육부로부터 인가를 받아서 경기도 광주 곤지암에다 학교를 세우고 신학생 전원 장학제도로 교육하는 특별한 역사를 이루어왔습니다.
그러니 일반 개교회주의자들과는 약간 다른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러므로 교단주의와 개교회주의의 절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셋째, 보수연합운동입니다. 개교회주의자들은 교회 정치나 연합운동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것이 일반적인 현상입니다. 그런데 이병규는 보수연합운동에 깊이 관여하였습니다.

그 대표적 사례가 다른 보수주의자들과 함께 <한국성경공회>를 조직하여 <바른 성경>을 출간한 일입니다. 이것은 대한성서공회의 <개역>성경이 잘못 번역되었다고 바른 번역의 성경을 출간하는 일에 이병규가 앞장을 선 것입니다.
 
이렇게 이병규의 사역은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보아야 할 일입니다. 이기선, 김현봉으로 이어지는 신앙의 계승, 김현봉, 백영희로 이어지는 개교회운동이 그것입니다.
하나님만 바라보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헌신한 주의 종들이 그립습니다.  
 
 
(30) 이 시대의 수도사 이영인 목사

지금까지 다룬 <좁은 길로 간 사람들> 28명은 모두 세상을 떠나신 분들입니다. 30명으로 기획한 이 시리즈의 마지막 두 사람은 살아있는 우리의 이웃을 다룹니다.

‘수도사’라고 하면 중세 수도원에서 세상을 등지고 성경연구와 기도 그리고 노동을 하여 자급자족하는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의 시대에도 수도사 같은 삶을 사는 이가 있습니다.

전남 여수 비행장 건너에 ‘신풍교회’라는 조그마한 교회가 있습니다. 이 교회의 성도들을 섬기는 이영인 목사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이영인을 말하려면 거창, 백영희, 신풍교회를 말해야 합니다. 그것이 그의 키워드(key word)입니다.
이영인은 경남 거창에서 출생하였고 그의 삼 형제가 모두 거창고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거창은 주남선, 백영희 등 신앙의 거장들을 배출한 곳이고 이영인도 이런 신앙 속에서 자라났습니다.

그는 거창고등학교와 부산의 동아대학교를 졸업하고 백영희가 목회하는 서부교회의 핵심이 됩니다. 미국 미주리주 세인트 루이스에 있는 카바난트신학교에 유학하여 신학연구를 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는 유학 후에 예수교총공회(백영희 그룹의 공식 명칭)의 교역자양성원(신학교)을 입학하여 졸업했습니다.

그는 서부교회 주일학교의 책임을 맡아서 어린이들을 성경대로 가르치는 사역을 하였습니다. 서부교회 주일학교는 당시 국제신문 조갑제 기자에 의해 “세계에서 제일 큰 어린이 교회 부산에 있다”는 특종이 보도되고, 서부교회 주일학교를 견학하려는 사람들이 교파의 구별 없이 몰려올 정도였습니다.

이영인은 여수 신풍교회를 담임하게 되었습니다. 신풍교회의 역사를 간략하게 소개할 필요가 있습니다. 1950년 9월에 애양원교회의 손양원 목사가 순교한 후 한국장로교회는 분열에 휘말립니다.1952년 4월 총회 측이 고려파를 제명하였고, 1952년 9월에는 고려파가 ‘총노회’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교단을 창설하였습니다.

이 여파가 애양원에도 미쳤습니다. 애양원은 미국남장로교선교부가 운영하는 한센병 환자 요양기관이고 당시 1천여명이 수용되어 있었습니다. 이들의 의식주와 치료와 복지를 선교부가 책임을 지고 있기에 교인들은 선교부의 지시를 따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순교한 손양원 목사의 신앙이 ‘고신 측’과 일치하였고 정양순 사모님 역시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선교부는 총회파를 지지하고 있으니 갈등관계가 시작되었습니다.

애양원 교우들은 선교부의 방침에 따라서 정양순 사모님과 결별하게 되었습니다. 사모님은 애양원 대문 앞에 있는 사택에서 개척을 하니 ‘손양원 목사’라는 이름 때문에 서로가 불편했습니다.

선교부에서도 맞 개척을 하여 두 개의 교회가 애양원 밖에 세워졌습니다. 1970년에 여수공항의 신설로 사모님의 교회가 대로변으로 옮기자 선교부의 교회도 100m 떨어진 곳으로 옮겨왔습니다.

사모님은 교회 개척의 어려움을 겪으며 고신 측에 속하였으나 고신이 1960년 총회 측과 합동하는 것을 보고 독립교회가 되었습니다. 이 교회는 김현봉, 이병규, 백영희 목사 등의 지도를 받았고, 백영희 측의 총공회에 소속이 되었습니다.

그후 이영인이 이 교회에 부임하게 되었습니다. 얼마되지 않는 교인들을 목회하며 <백영희 목회연구소>를 설립하여 자료를 모우고 정리하는 일을 해왔습니다. 
 
그가 한 일 중에서 몇 가지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백영희 목회설교록>이라는 설교집을 간행했습니다. 평균 5백여 페이지되는 설교집을 지금까지 182권을 간행했습니다. 백 목사 설교를 기침 소리까지 녹취할 정도였습니다. 아마도 우리나라에서 최대 분량의 설교집이라고 하겠습니다.
25년이 더 지난 것같습니다. 우리가 방문한 그때의 신풍교회는 조그마한 시골교회였습니다. 이영인이 안내한 자료실에는 건물 전체에 전기가 없었습니다. 왜 전기시설을 하지 않느냐고 하니,“만약 전기가 합선되어 불이 나면 백 목사님의 자료가 모두 불타버릴 수 있기 때문에 전기시설을 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남편은 “땅이 꺼지면 어쩔것인가?”라고 하면서 웃었지만, 이영인이 얼마나 백목사님의 자료를 귀하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목회연구소>를 신축하고 자료를 디지탈화하여 현대식으로 잘 보존하고 있습니다.

둘째, 신앙자료의 간행입니다. 이영인은 거창 위천교회 주일학생들의 국기배례 거부 사건의 전말을 책으로 간행하였고, 또 서부교회 주일학교에 대한 책을 내어서 당시 베스터셀러가 되었습니다.
그는 또한 총공회의 신앙노선을 변증하는 책들을 출판했고, <백영희 전기>와 <백영희 연구>등의 연구서 간행하는데 자료를 제공하여 총공회의 신앙을 체계화하는데 헌신하였습니다.

셋째, 수양회의 인도입니다. 백영희 목사가 별세한 후에도 이영인은 한 해에 두 번씩 덕유산 등지에서 전교인 수양회를 백영희의 뒤를 이어서 인도하고 있습니다.

그는 늘 성경을 연구하고 새벽기도를 마친후 개인기도를 오전 10시가 되어야 마칠 정도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그를 만나려면 오전 10시 이후가 되어야 가능합니다.
 
하나의 에피소드를 소개합니다. 총공회에서는 목사 안수를 받으려면 성경 100독을 해야 합니다. 이영인은 백영희 목사의 설교집을 간행하느라고 시간 투자를 많이 하므로 총공회에서 특별 사항으로 ‘100독 규정’에서 예외로 목사 안수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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